사랑은 일종의 영구적 예외의 상태이며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또 자기 자신에 대한 또 자기들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투쟁 상태다.

 

사랑하는 사람의 최고의 행복은 개성의 발휘가 아니라 상실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밖에는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너와 함께 살다가 죽고 싶다는 것과 너에게 새로운 언어로 이야기하겠다는 것과 내가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고 어떤 일에도 종사할 수 없으며 결코 소용되는 인간이 될 수 없으며 모든 것과 끊겠다는 것과 다른 모든 것과 헤어지겠다는 것밖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일각 일각 세계 밖으로 밀려나간다.

"너의 편이고 모든 것에 반대해서 시대가 시작된다."

이와 같은 정열의 불에 몸을 태운 사람에게는 온갖 자유는 내재 속에 떨어져 버리고 죽음만이 해결의 길이 된다.

 

그들은 큰 걸음으로 세계에서 멀리 떨어지고 온갖 현실적인 것과의 교섭을 거부하고 사회에 있어서, 세계에 있어서 자기의 지위를 만들 것을 포기하는 단념자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후에 의사한테 걸린 어린 시절의 여동무, 또 이미 다섯 명의 아이를 가진 시골의 이웃' 즉 타협하는 사람만이 '창조 이전과 같은 카오스인 사랑의 신비'에 상처입지 않는다. 즉 그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은 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이 세상의 인습에 의해서 지지되고 오래 살 수가 있다.

그러나 무서운 사랑의 정열에 몸을 태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서로가 자기의 초월을 상대방에게 맡겨 버리려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을 영원화하려는 무모한 의도를 갖는다.

 

이것은 여자에게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통 여자의 사랑의 이상은 완전한 자기 포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융해되어 無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나 '여자가 사랑이라는 말 밑에서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헌신, 육체와 영혼의 전혀 고려도 보류도 없이 하는 헌신이다'라고 니이체도 말하고 있다. 즉 역사와 생활 상황이 우월한 존재보다 완성된 존재라고 끊임없이 가르쳐 준 남성이라는 존재 속에(이에 관해서는 시몬 드 보봐르의 異論이 있다 - 제2의 性) 여자는 자기의 존재를 초월하고 융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서는 사랑이란 인생 그 자체일 수는 없고 다만 많은 가치 속의 한 가치에 불과한 것이며 남자는 여자 속에서 자기의 실존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고 반대로 자기의 실존 속에 여자를 일체화하고 부속시키려고 할 뿐이다. 즉 행동에 의해서 실현하는 본질적 주체적 존재로서의 남자는 사랑에 의해서 세계 포기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행동을 확대하려고 노력할 수가 없다. '여자는 자신을 내던지고 남자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풍부하게 만든다'라고 니이체가 말하고 있는 것도 이 뜻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남자가 여자와 똑같이 자기 포기의 의욕을 가지고 그것을 행동에 옮긴다면 그 사랑은 순간적인 것이 아닌 다음에는 타협성을 잃고 만다.

 

즉 여자는 남자가 완전히 자기에게 속해 있고 사랑에 속해 있기를 원하나 그와 동시에 자기의 초월을 맡긴 남자 속에서 자기가 포기한 세계 속에서의 온갖 기획과 행동과 성공을 기대한다.

 

즉 자기에게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계에 속한 것(즉 자기에 속하지 않은 것)을 요구한다. 마치 신에서와 같이... 이 요구는 전체적으로 이미 무리한 것이다. 따라서 보들레르도 그의 '여행에의 초대'에서 "사랑하면서 죽자!"(Aimer et Mourir!)라고 노래했으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신화의 진리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생활의 서서한 파괴 작용과 둘만의 권태에 의해서 죽이느냐 또는 사랑을 지닌 채 죽느냐의 양자 택일밖에는 남겨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지상과 피안의 양자 택일인 것이다.

 

- 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랑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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